지금도 별로 기골이 장대하거나 몸이 드세보인다거나 하지는 않지만(얼굴 말고...) 어렸을 때는 특히나 심했다. 부모님께서는 어디 가서 맞고나 다니지 않을까 걱정이 되셨는지 나를 합기도 도장에 보내셨다. 여기 저기 많은 태권도 도장도 아니고 왜 굳이 합기도였나 하면 아버지의 고집이셨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도장에 다녀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텐데 그 중에는 자기가 오고 싶어서 온 아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도장을 들어설 때마다 왼손은 주먹을 쥐고 오른손은 곧게 펴서 모으며 허리를 숙이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예의와 규칙을 배우는데 언제나 앉을 때는 무릎을 꿇고 허리를 펴고 10분이고 30분이고 앉아 있어야 했고 매일같이 도장 바닥을 물청소 하고 기구를 바르게 정리하고 먼지를 닦아 없애고... 솔직히 이런 게 재밌을 애는 없다. 있으면 애늙은이지.
시간이 지나고 띠의 색이 짙어져감에 따라 나중에 들어온 동생(후배나 사제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들을 가르쳐 주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생활 습관이나 사고 방식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남자라면 누구나 무술 영화의 주인공, 하다못해 포청천의 전조를 보고서라도 '와 강해 보인다 부럽다' 비슷한 생각을 한 번 정도는 품어 보았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이 빗나가게 되면 단순한 힘만으로 상대와 겨루어 보고 싶기 마련이고 실제로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되면 그 보잘 것 없는 감정에 도취되고 중독되기 십상이다(사실 이건 어릴 때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듦에 따라 자신이 가진 돈이나 구체적인 물건, - 집 자동차 애인 - 권력에 집착하여 타인과 비교하는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한 번의 타격, 한 번의 꺾기로 상대를 완벽하게 무력화하는 기술을 발휘하는 1:10 장면. 더 말하고 싶지만 뭘 말해도 스포일러고 뭘 말해도 입만 아프다. 직접 보자.
무술, 무예, 권법... 시초 자체가 자신을 방어하고 타인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며 목적에 따라서는 전쟁, 전투에도 사용되었으니 이것이 폭력과 압제로부터 순수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무술(태권도 합기도 검도 유도...)의 이름에 왜 '道'가 붙어 있는가(사실 무술이라 함은 기술에 의미를 좀 더 부여한 단어이고 나는 무도라고 칭하고 싶다)? 이것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른 길인지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북파권이 당신의 남파권에게 졌소!"
"천만에, 문제는 문파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위와 관련하여 합기도를 수련하던 동안에는 구체적인 것을 듣진 못했다. 관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도덕 책을 펴면 나오는 것들이었을 뿐이었다. 교통 신호 어기지 마라, 시간 약속 잘 지켜라, 어른께 인사 잘 해라... 가끔 어린 우리들이 이해 못할 선문답같은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말씀이 하나 있다. "왜 검은띠를 제일 나중에 매는지 아느냐? 그것은 검은색이 모든 색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배운 자의 책임과 행동거지에 대해서 넌지시 일러주시고 싶었을 터이나 우리는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었겠지.
그 시절에 생각한 것과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종합해 보면 단순한 결론이 나온다. 첫 번째, 나 자신을 돌아보자. 써 놓고 보니 참 뭐가 대수인가 싶지만 가끔 우리는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에 기쁨을 느끼는지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감정에 논리를 끼워 맞추기 일쑤고 머리의 창을 닫아 버린 후 더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면 그게 편하거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는 것은 힘들 뿐더러 때로는 정말 부끄기 짝이 없는 일이다(그래 이런 글 쓰는 것도 부끄럽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나날이 반복되는 힘든 몸의 움직임을 통해 내 자신의 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있었고 몇 번의 부상을 통해(어릴 땐 잘 낫는다)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무리하거나 함부로 행동한 경우 무슨 일이 생기는지 뼈에 새길 수 있었다.
격투나 무술 영화를 보면 신나게 싸우는 장면이 통쾌하고 그 영상에 중점을 둔 영화가 많은데 엽문은 그런 장면도 있지만 엽문(주인공)이 혼자서 목인장을 툭탁툭탁하면서 수련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단순한 수련 모습이지만 내면으로의 깊은 성찰이 느껴져 굉장히 인상깊었다. 오랜 시간 동안 수련과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은 이 시대의 마지막 무술인 견자단이 아니라면 저런 포스는 누구에게서도 나오지 않았을 것(70세를 종심從心이라 하여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형님은 벌써 그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사실 스토리는 정말 뻔하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단순한 기승전결에서 승리하는 주인공. 하지만 엽문의 인품이나 세상에 맞서는 자세같은 점에서 새겨 볼 것이 많아서 좋았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매일같이 도장에서 다른 사람들고 머리와 몸으로 부딪치다 보면 싸울 일도 있고 함께 힘을 합칠 때도 있는데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좋든 싫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고집을 꺾고 모두에게 이로운 길을 택하게 된다. 방법이야 어쨌든 결국 자신과 함께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다 보니 참 많은 것들이 떠올라 다 적고 싶은 욕심에 글이 매끄럽지 못한데 이해바랍니다.
@ 견자단 진짜 멋있음
한 번이라도 이런 영상에 넋을 잃어본 사람은 재밌게 볼 수 있을 터.
그런데 뭘하면 주먹이 그렇게 빠른 걸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