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기간이 끝나는 탓도 있지만 다음 학기는 이동 시간의 압박없이 좀 더 편하게 학교를 다니고자 이사를 하려 한다. 처음엔 스누라이프에서 적당히 넓은 방을 찾아서 방을 보러 다녔는데 두 곳 빼고는 모두 고양이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한 곳은 집을 담보로 건물값과 비슷한 액수의 대출이 있었고 한 곳은 월세가 엄청나게 비쌌다. 애초에 고양이 때문에 거절을 당할 바에야 처음부터 전화로 물어보면 좋지 않겠나 싶었는데 이게 또 그렇지가 않다. 얼굴을 보고 자세히 설명을 한 다음에 반응을 보는 거랑 목소리로 건조하게 용건만 말해서 원하고자 하는 대답을 듣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뭐 애초에 그 동네에서 그 정도 나이를 가진 건물주들이 내가 면전에서 이야기한다고 마음이 바뀐다거나 하진 않겠지만. 어쨌거나 지푸라기든 뭐든 좋으니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전화를 했고 중성화 수술을 시켜놔서 시끄럽다거나 한 문제가 전혀 없다는 설명이 끝나자마자 쿠크가 날카롭게 울었다. 야옹. 허허 난 고양이 안 되겠는데. '고양이고 뭐고 안 돼'라던 며칠 전의 어떤 건물 아저씨보단 부드럽게 거절해서 크게 감정의 변화는 없었지만(애초에 예상하기도 했고) 휴대 전화의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매섭게 쿠크를 노려보았다. 너도 4년 동안 나랑 같은 방에서 뒹굴었으면 내가 지금 너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겠지 이것아.
같은 이유로 현재 내 방은 동네의 여러 부동산 업체의 리스트에 들어가 있다. 하루에도 몇 사람씩 다녀가곤 한다. 덕분에 평소에 잠잠하던 휴대폰이 바쁘게 울어대고 있긴 하지만 별로 썩 기분이 좋은 이유는 아니다. 방에 고양이가 있다는 건 방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참 생소한 경험일텐데 지금까지 고양이가 있다고 반갑게 여기는 사람은 딱 한 번 봤다. 주변에 애묘인이 많고 그냥 귀여워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결국 집고양이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이 정도 수준인 것이다. 더군다나 '관상용'이 아니게 되는 순간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신이 데리고 사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사올 집에 고양이가 있다는 것은 애완 동물들의 털과 위생 문제가 머리 속에 떠오르고 단순히 비가 오고 습하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나는 희미한 하수구 냄새마저 저 동물들의 탓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슬슬 고양이들의 스크래쳐를 갈아줘야 할 때가 왔다. 쿠크가 다른 박스를 긁어대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스크래쳐를 갈아줘야 할 것 같은데 이사와 맞물리면서 또 방 안에 물건을 늘리거나 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예전에 사 놨지만 애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천 재질의 스크래쳐를 다시 어떻게 좀 잘 쓰게 할 수 없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캣닙이 눈에 띄지 않아서 뾰족한 수가 없던 찰나, 오늘 찬장 구석에서 캣닙 가루를 발견하고 애들의 요로 전락했던 스크래쳐에 살포했다. 장롱 위에서 상황을 살피던 쿠크를 제치고 먼저 양갱이 접근했다. 캣닙 기운에 얼굴을 비비적대고 스크래쳐 위에서 온 몸통을 굴려대는 쑈를 하더니 약 기운에 못 이겨 스크래쳐를 몇 번 긁었지만 그 이후는 없었다. 쿠크도 마찬가지. 이래서 어릴 때 버릇을 잘 들여놔야 하는데 싶었다. 별 생각없이 어렸을 시절을 방임했더니 다 큰 지금에서야 잘못된 버릇을 고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구나 싶다. 비슷한 이유로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학원을 보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거랑은 또 다른 것 같다. 반려 동물들이야 버릇을 들이기 위함이지만 사람의 경우는 그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하게끔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물론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다양한 경험도 있겠지만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아무리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겪었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어서 성찰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되면 비뚤어진 사람이 되고 마는 게 아닐까. 반대로 한 가지 경험에서도 제대로 된 인식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힘들겠지만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그럴 수 있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짜며 살아야 할 것 같다. 직접 구르기 싫으면 간접 경험을 많이 하든지.
고양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옛날 로그를 첨부.
어느 날 출근을 해서 졸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빠시] 으 시발 졸리다
[ㅇㅊ] 주무시면 될듯
[ㅇㅊ] 짤려도 고양이 밥값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ㅇㅊ] 군대만 안가면 됨
[ㅇㅊ] 기타를 한대 팔고 퇴사하면 모든것이 해결
[wn] 짤리면 실업수당으로 먹고살면 댐
[ㅇㅊ] 넌 굶어도 고양이만 먹이된 되지
[빠시] ...
[sm] 오늘 짤리면 내가 뉴트라골드 한 팩 사줌
[sm] 고양이가 무슨 죄냐
[sm] 흑흑
[ㅇㅊ] 나도 캣닢 하나 사드리겠음
[ㅇㅊ] 고양이도 약좀 해야지
[빠시] 푸하하하하하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빠시] 시발 고양이도 약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런 이유로 방 정리를 시작했다. 먼저 입지 않는 옷들을 전부 내다버릴(정확히는 동네 옷 수거함으로) 생각으로 수납장과 장롱, 그리고 내 방에 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옷나무가 하나 있다. 겨울옷도 있고 요즘 입는 옷도 있고 여름옷인데 요즘 입지 않고 그냥 방치해 놓은 옷들이 잔뜩 걸린 옷걸이인데 거기에 있는 옷들을 전부 하나씩 입어보고 사이즈가 안 맞는 것들은 전부 개어서 내다버릴 생각으로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시간 동안 씨름을 하고 보니 옷이 세 무더기가 나왔다. 가지고 있는 옷의 2/3를 갖다버린 것 같다. 그 중에는 내가 입은 기억이 없는 옷들도 있었고 심지어 태그마저 떼지 않은 옷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부모님(정확히는 어머니) 하지만 전 그 옷들을 입을 수가 없어요. 이제 옷 사지 말라고 말씀도 드렸고 몇 번 버젓이 스스로 산 옷 잘 입고 가서 잘 지내는 꼬락서니를 보여드렸으니 이제 옷 따윌 사서 보내시진 않겠죠. 입학식도 있기 전에 새터를 가서 받은 자켓도 있었다. 대체 이걸 내가 왜 가지고 있는 걸까 싶었지만 다른 옷들을 살펴보니 뭐 그럴만도 했다. 애초에 옷 정리같은 걸 전혀 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태그가 떼지지 않은 옷의 품질은 너무나 좋아서 정말 이걸 버려야 되나 누굴 줘야 되나 엄청나게 고민을 했는데 품질이 좋고 태그가 붙어있는 옷을 발견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있지도 않은 미련이 순식간에 생긴 것이었다. 물론 남을 줘서 잘 입으면 참 보람차겠지만 그건 내가 옷 수거통에 넣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미쳤다. 바이바이. 오늘 처음 본 너는 참 부드럽더라.
땀을 뻘뻘 흘리며 집과 수거함을 세 번 왕복해서(세 무더기였으니) 옷을 다 처분한 다음에 드는 생각은 이사하기 전에 쓸데없는 건 모조리 다 버리자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저녁도 먹고 내일 오전에 먹을 빵도 좀 사고 슈퍼로 가서 쓰레기 봉투를 사기 위해서 점원 아주머니께 물었다. 제일 큰 쓰레기 봉투 사이즈가 얼마예요? 100리터랜다. 그럼 그것보다 작은 건요? 50리터라길래 그걸 두 장 달라고 했다. 아마 버리다 보면 그거 두 장으론 어림도 없을 것 같지만 일단 가볍게 정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뭘 버릴 거예요? 생각도 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아 제가 곧 이사를 하려고 방을 정리하고 있어서요. 그 아주머니께서 내가 의심스러워서 물어본 게 아니라 그냥 무심코 한 질문이었을 수도 있고(사람들이 그렇게 잘 안 사 가서?) 괜한 나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이런 질문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 되어버린 게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치며 한 편으로는 서글펐다. 그래 시커먼 남자가 슈퍼에 와서 엄청 큰 쓰레기 봉투를 사 가면 무슨 짓을 하고 뭘 버릴지 알게 뭐야.
드럼 레슨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연습해 온 베이스와 기타, 노래 등등에서 계속 단점을 발견하게 된다. 언제나 칼처럼 박자를 맞출 순 없겠지만 원할 때 원하는 세기의 음을 내는 것도 미숙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연습이라는 건 결국 자신이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갈고 닦아 잘 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일 좋아하는 노래만 연주하거나 불러서는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돌아봐도 어려운 곡을 연습했을 때 실력의 향상을 가장 몸으로 느끼기 쉬웠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노래가 좋아서였거나 촉박한 공연 준비 혹은 우쭐하고 싶은 아이같은 욕망 등등 다양했지만. 사실 뭘 잘하고 싶으면 원리는 간단하다. 좋은 예를 보면서 그것을 따라하고 그 경지에 이르렀는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예민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많은 경험 그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건 아니다. 자신이 잘 하고 있는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면 어느 수준 이상을 넘기는 불가능하다. 녹화를 해서 보는 게 좋다, 항상 메트로놈을 켜 놓고 연습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러니까 연주를 잘 하고 싶으면 많은 시간 연습을 하되 좋은 연주를 보고 제대로 하고 있는지 계속 관찰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으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좋은 코드와 프로젝트를 참고하여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볼 것이며 좋은 연애를 하고 싶으면 많은 시간 연애를 해서... 뭐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