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기
사실 퇴소하기 전까지는 이것만 적을 생각이었으나, 나오고 나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 적어 보려고 한다.
안에서 겪었던 일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써 볼 생각... 이긴 한데 훈련소에 있으면서 깨달은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할 수 있으면 지금 하는 것이 제일 좋고 미루면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여유 시간이 있을 때 미리 화장실을 간다거나 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일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입소하면 '훈련용 수첩'이라는 조그마한 수첩을 하나 준다. 그리고 볼펜도 준다. 틈날 때마다 이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보통 그 날 있었던 일이나 떠오르는 생각(이 외의 것들은 거의 없기도 하지만)들을 적었는데 수첩을 쓰는 속도를 보니 퇴소 전에 수첩을 다 써버릴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결국 마지막엔 수첩에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쓰고 그것도 모자라 주소록에까지 일기를 쓰다가 왔다. 그리고 볼펜 하나를 다 썼다. 내가 펜 한 자루 다 써 본 게 고등학교 시절 하이텍 볼펜 두 자루 정도 뿐일텐데... 쓰고 있으니 고3 때 열심히 일기 쓰던 게 생각났다. 나는 할 게 별로 없으면 일기를 열심히 쓰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건 그렇고, 12월 11일이 되어 훈련소를 나오게 되었는데 훈련소에서 연무대 터미널까지 버스를 태워주더라. 정문을 통과할 때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함성을 질렀다(...) 연무대 터미널에 도착하여 일단 대전으로 가기로 했다. 동대전으로 가는 버스를 40분 정도 기다렸는데 훈련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전부 주구장창 담배를 피워댔다. 신기한 건 그걸 보면서도 별로 담배 생각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다시 안 피우기로 작정해서 그런 건지...
안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로 괴로워 한다. 담배를 못 피워서, 여자를 못 만나서, 갇혀 있어서, 시간이 안 가서... 욕심을 버리면 덜 괴로워진다는 걸 입소하는 날에 깨달았다. 그리고 퇴소할 때까지 하나하나 욕심을 버리니 괴롭고 짜증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끔씩 요령 피우면서 노는 애들 때문에 내가 좀 더 움직여야 할 때 '얄미운 녀석'하는 생각이 드는 정도뿐이었으니. 정신적으로는 편했으나 한 편으로는 상당히 불안했다. 내가 이토록 체제순응적이었나 하는 유쾌하지 못한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뭐 여튼 그건 아무래도 좋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절대 감기에 걸리지 않겠다'라고 곱씹었다. 아침 점호 후 상의 탈의를 하고 추위를 느낄 때나 한껏 뛰고 잠시 쉴 때 땀이 식을 때, 잠들기 직전 등등... 이러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절대 감기 안 걸려서 나간다라고 계속 생각했다. 몸 상태 변화에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물집도 생기지 않았다. 물집이 생길 것 같으면 바로 반창고를 붙이고 며칠을 버티면 물집이 생기지 않고 굳은살이 생겼다. 주/야간 행군 때는 출발 전에 미리 반창고로 물집이 생길만한 부분을 감아두었다. 덕분에 물집이 생길 뻔한 수준까지만 가고 물집은 생기지 않았다. 아침이나 불침번 때 전투화를 신고 몇 발자국 걸으면 발바닥에 멍이 든 것 같은 통증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안에 있던 이야기는 나중에 쓴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다 그냥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들 뿐이네... 훈련소 안 다녀온 사람들은 별로 재미없는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다녀온 사람들한테도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_- ; 그럼 이제 이야기했던 대로 나와서 있었던 일들을 써야겠다.
연무대 터미널에서 40분을 기다려 동대전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우리 소대 분대장 중 한 명의 집이 대전이라고 하길래 안에 있을 때 대전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봤는데 "한 30분?" 이라던데 그건 그냥 유성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1시간 걸리더라. 내려서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포항으로 가는 표를 샀다.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점심 먹기 애매한 시간이라 그냥 커피 한 캔 마시고 버스를 타고 갔다.
요즘 버스는 TV를 잘 틀어준다. 힐끔힐끔 보고 있었는데 'KBS 관현악단 송년 음악회'라는 광고가 나온다. 얼마 전이 11월 아니었나? 근데 뭔 송년 음악회야?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원래 차 타고 음악 들으면 5분 내로 자는 체질인데 내가 그렇다고 커피 마신다고 잠 못 자는 사람도 아니었고. 가는 길에 휴대폰으로 전화하고 문자하고 하니 참 재밌었다. 입소 전에는 이렇게 사람들이랑 열심히 연락해 본 적이 없었는데...
포항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집까지 택시를 타니 4000원이 나왔다. 탔을 때 어디까지 가냐고 묻지도 않고 내릴 때 인사했는데도 묵묵부답이던데 문을 닫고 생각해 보니 '혹시 장애가 있는 사람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그런 것이었다면 잠시나마 밉살스럽다는 생각을 한 내 자신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항으로 가면서 '금요일에 휴가를 쓰고 주말에 올라간 다음 월요일에 출근해야지'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금요일까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인재님께 들어서 집에서 원격으로 일해야겠구나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연차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연차사용가능일수가 0일로 나오는 것이었다. '아직 휴직 상태라서 그런가? 그럼 자정이 넘으면 신청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밀린 rss 리더를 보거나 irc로 잡담을 하면서 자정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자정이 되어도 변하는 게 없는 것이 아닌가. 보니까 복직신청처리가 완료된 흔적이 없었다. 헉 내가 휴직 신청만 하고 갔던가?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한 문구...
'휴직 종료전 14일 이내에 복직원이나 제휴직원을 제출하지 않을 경우에는 복직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자동 퇴직처리 한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짤린다... 그말인가? 어찌됐건 연차도 못 쓰는 상태고 나는 오전 1시경에 부랴부랴 자초지종을 설명한 메일을 인사담당자와 팀에 보내고 2시에 잠들 수 있었다. '첫 차로 올라갑니다' 6시에 알람을 맞췄는데 잘 일어났다(...) 아침에 급하게 짐을 싸고 집에 몇 시간 있지도 못하고 동생한테는 인사도 못하고 옷이랑 모자만 뺏어온 아들/형이 되어버렸다. 4시간밖에 못 잤는데도 이상하게 버스 안에서 잠이 별로 안 왔다. 좀 자긴 했지만...
확인을 해 보니 입소 전에 복직 신청을 했으나 인사담당자가 반려를 한 상태였다. 그리고 자그마한 코멘트에 '나오셔서 다시 복직 신청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써져 있는 것을 쉬지도 못하고 첫차타고 올라온 사무실의 노트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OMG... 이런 거였으면 굳이 오늘 새벽에 난리치면서 올라올 필요는 없었는데. 그런데 왜 인사담당자는 메일 답장도 없고 사무실 전화/개인 휴대폰 다 안 받는 거지?
급하게 해야 할 일 또한 co-work 하는 쪽이 오늘 워크샵이라서 필요한 데이터를 받지 못하여 다음 주나 되어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좀 허탈하긴 했지만 그 전에 준비할 게 좀 있긴 하니 월요일 전까지 마무리를 좀 지어야겠지...
집에 오는 길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어색했다. 4주나 못 보던 버스나 풍경, 거리들이 바로 어제 보았던 것처럼 익숙할 줄이야. 물론 그 동안 두꺼워진 사람들의 차림은 조금 어색했지만. 버스에서 내려 마트에 들러 먹고 마실 걸 조금 사고 옆의 빵집에 가서 고로케랑 소보루빵, 그리고 주인 아저씨로 보이는 분이 갓 내었다고 하는 단팥빵을 샀다.
집은 나올 때랑 똑같았다. 뭐 당연한 것이지만... 오자마자 산 물건들을 냉장고에 넣고 바로 음악을 틀고 열심히 기타를 쳤다. 아 그래 바로 이거지... 담배 생각은 하나도 안 나도 매일매일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기타를 치고 싶었다. 발바닥을 보니 새카맣던데 문을 조금 열어두고 가서 4주 동안 밖의 더러운 것들이 바닥에 쌓인 모양이었다. 열심히 방을 닦고 빵을 먹었다. 사실 난 단팥빵 별로 안 좋아했는데 이건 정말 맛있었다. 일단 빵도 부드럽고 팥이 퍽퍽하지 않아 일품이었다. 소보루빵도 직접 구운 것 같던데 오오... 그냥 달아서 다 맛있다고 느껴진 건가?
오늘 올라오면서 브로콜리 너마저의 청춘열차를 열심히 들었다. 가사도 일품이고 무엇보다 단순하면서도 예쁜 멜로디가 훅이 있어서...
더 이상 내 앞엔 모노레일이 없어
이대로 있다간 주저앉고 말겠지
끝없는 저 우주를 날으는 은하철도 처럼
아직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해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우리 동네를 빙글빙글 달렸다.
끝없이 달려가는 우리에게 종점은 없어
아직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나아가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