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창립 기념일 대체 휴무로 오늘은 노는 날.
어제는 집에서 있었지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밖으로 나갔다.
나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 코엔 커다란 점이 하나 있다. 아주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점이 없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점이 생기더니 시간이 지날 수록 조금씩 커져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가끔씩 주변에서는 "점 안 빼냐"라는 말을 하는데 난 항상 보니까 별로 있는 줄도 모르겠고 불편할 것도 없어서 그냥 뒀는데 어느 날 팀장님께서 보시더니 "돌출된 건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니까 조직 검사 정도는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추천해 주신 피부과로 가 봤는데 자기가 보기에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기왕 조직검사를 할 거면 여기보다는 3차 진료 기관으로 가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길래 제생병원으로 갔다.
분당 제생병원의 특진 이야기는 회사 게시판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까먹고 있었는데 여기는 '특진'이라는 개념이 있다. 특정 때에는 진료비가 증감되는 형식인데 나는 평일엔 출근해야 되고 오늘밖에 시간이 없으니 별 수 없이 그냥 오늘 진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접수할 때 옆에 아주머니 한 분이 접수원에게 "아니 왜 자꾸 특진 시간에만 환자를 붙이려고 그래요 지금 이 분도 오늘 초진인데..." 어쩌구 저쩌구 하시던데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아주머니 어쩌겠습니까 아프고 시간 없는 게 죄죠 으헝헝...
처음 찾아간 피부과에서 제생병원에 전화했을 때 1시간 30분 정도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고 했는데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버트런드 러셀 자서전을 가져갔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꽤 심심했을 듯. (상)권 46쪽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우리를 가르쳤던 착한 숙녀분은 정통 프뢰벨Froebel식 교육을 했으며, 당시 기준으로 보면 놀라울 만큼 신식이었다. 그때 배운 것들을 나는 지금도 거의 다 상세하게 기억하지만, 노란색과 파란색 물감을 섞으면 초록색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 일이 가장 감격스러웠던 것 같다. 그래요 이거 진짜 감격스러웠는데...
전화했을 때는 1시간 30분이었던 대기 시간이 접수하면서는 1시간이었고 실제로 기다린 시간은 30분이었다. 으흠 개발할 때 개발자의 추정 시간에다 곱하기 3을 한 다음에 예상 일정으로 정하라는 거랑 비슷한 거군요 네.
(사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러면 안 됩니다)
사실 난 엉덩이에도 -_- 좀 커다란 점같은 게 있는데 진료실에 들어가서 코와 함께 보여주니 엉덩이의 그것은 피부섬유종이라고 별 거 아니라고 혹시 아주 가끔씩 찌릿찌릿하지 않냐고 물었다. 가끔 의자에 잘못 앉아서 그 부위에 충격이 오면 순간적으로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는데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별 거 아니라고 나중에 커지면서 앉을 때 문제가 생기면 그 때 제거하면 된다고 그랬는데,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코의 점을 유심히 보더니 검사를 해 보는 게 좋겠다고 그랬다. 거기다 "혹시 가족 중에 악성 흑색종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나요?"라고 물어보는데 순간적으로 철렁 ... 뭐 없지만.
나가서 검사 비용 수납과 동시에 다음 주 예약을 했다(검사 결과 들으러 와야 되니까). 다음 주 진료비를 아예 먼저 받아버리네 킁. 앉아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길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벽걸이 TV에서 블레이드3가 나오고 있었다. 오 간만에 보는 웨슬리 스나입스... 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뱀파이어 잡는 액션 영화? 피도 튀어? 아니 이것 봐요 병원에서 이런 영화 틀어도 되는 겁니까 사운드 오브 뮤직 틀어도 환자의 안정에 도움이 될까 말까 하는 판인데... 아니 사실 스피커에서 AC/DC의 Highway To Hell 같은 게 나오면 재밌겠지만.
검사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치료실에서는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들어가기 전에도 심각해 보이는 아이도 있었고 들어가기 전엔 멀쩡했는데 나올 때는 피부가 다 뒤집혀서 나오는 아이도 있었고 그렇더라. 치료실같은 건 좀 대기실이랑 거리를 두든지 방음 시설을 좀 잘 해 놓든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쩔 수 없지.
5시가 넘어서 퇴근 하는 의사도 보였는데 아직 내 차례는 오질 않아? 환자들이 다 나가고 나 혼자 의자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그제서야 왠지 차례를 까먹었다는 듯이 나를 부르길래 들어갔다. 치과처럼 진료대에 누웠다. 난 간단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앉아서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코끝이 따끔하던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게 마취가 아니었나 싶다. 의사와 간호사가 계속 잡담을 하던데 그 와중에 내가 하도 가만히 있으니까 간호사가 "이 사람 기절한 거 아녜요?" 의사는 기구 뒷부분으로 내 코를 툭툭 건드리면서 "깨어 있죠?" 아니 이거 지금 뭐하는 짓이여... 그리고 나서 떼낸 부위를 보여주던데 생각보다 깊다고 그랬다. 깊다고 나쁜 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는 걸 알려준다고 그러던데 그럼 아예 애초부터 그런 소릴 하지 말든지 orz 그리고 왠지 계속 잡담을 하던데
간호사: 아까 그 할아버지는 증상이 뭔가요?
의사: 어떤 할아버지?
간호사: 발에 그...
의사: 아 그 분? Malignant Melanoma.
간호사: 에... 그게 뭐죠? 처음 듣는데.
의사: 악성 흑색종이라고 피부암의 일종인데 아주 질이 나쁜 거지. 몇 달 전에도 그 사람 찾아온 적 있었는데 그 때 발목을 잘라야 된다고 그랬는데 안 그러고 있다가 오늘 다시 온 모양이네. 지금은 다리까지 잘라야 될 걸?
간호사: 어머나 어떡해요.
의사: 어쩌긴. 지금은 전이가 많이 되어서 상태가 아주 안 좋을 거야. 악성 흑색종 하면 피부과 의사들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주 악질이지. 어우.
아니 이거 보세요 출혈 막는다고 거즈로 덮어 놓고 코 누르고 있으면서 이런 이야기 해도 되는 겁니까? 심장 박동수 증가하고 혈압 올라가서 지혈에 방해가 될 것 같진 않나요?
...
의사: 그나저나 이거 10분은 누르고 있어야 되는데 ㅇㅇ(간호사 이름)가 잘 눌러줘요~
간호사: 엑 10분요? 오늘 집에 못가겠네 ㅠㅠ
의사: 아니면 집에 가면서 눌러주든지 호호호. 집이 어디예요?
나: (모든 걸 포기했지만 코맹맹이 소리로) 수내 3동이요...
간호사: 반대라서 안 되겠네~
아니 어차피 같은 방향이라도 안 그럴 거 안다고요
간호사: 그러고 보니 저 자주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타요. 지난 번엔 정자역입니다 안내 방송 나오는데도 멍때리고 있다가 그만...
의사: ㅋㅋㅋ 멍 때리면 안 되지 삼성역같은 경우엔 바로 반대방향으로 탈 수 있는데. 삼성역하니까 생각나는데 지난 번에 삼성에서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반드시 시간을 맞춰야 해서 차 안 가지고 가고 일부러 지하철을 탔거든? 근데 누가 지하철에서 영화를 찍길래 그거 본다고 내려야 될 곳을 지나쳤지 뭐야(난 이 때까지만 해도 영화 찍는다는 소리가 뭔지 몰랐다).
간호사: 어머나 세상에~
의사: 요즘은 많이 개방적이 되어서 자주 그러지 않나?
간호사: 저는 쑥쓰러워서 못 보겠던데(이 때 알아차림).
의사: 난 안 보는 척하면서 계속 다 쳐다보거든 ㅋㅋㅋㅋ
간호사: 저는 커플들을 증오해요~♬
의사: 에이 마음을 곱게 써야지. 아직 스무살이라서 별로 생각이 없나? ㅋㅋㅋ
이쯤 되니 듣는 것만으로도 지친다
의사: 이거 잘 눌러줘요.
간호사: ...
의사: 멀쩡한 젊은이 코 괴사 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ㅇㅇ씨가 책임져야지?
간호사: 네... 뭐... 제가 책임... 지... 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의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발 살려주세요
대화 우주 가는 건 제 주변 사람들 뿐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orz
결국 어떻게 누르고 있는지만 알게 된 다음에 나는 퇴근하는 간호사들과 의사들을 보면서 처량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즈로 코를 삐뚤어져라 누르면서.
종합병원 문닫는 시각의 풍경도 참 생경한 것이 새로웠다. 어떤 의사는 진료 끝나고 퇴근 시간 땡하자마자 자기 진료실에서 옷 다 갈아입고 나오더라. 필시 흰 가운을 입고 있었을 의사였을텐데 문을 벌컥 열고 나오는 사람은 어딜 봐도 강남이나 압구정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젊은 아가씨. 그 왜 있잖아 슈퍼맨이 파란 타이즈에 빨간 팬티 입고 화장실 문 벌컥 열고 나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물론 그 분 복장이 이상했다는 건 아니고. 그리고 진료가 끝나도 간호사 및 직원들과 잡담을 나누는 의사도 있었고 간호사들은 간호사실에서 수다를 떨었을 것처럼 무리를 지어 병원을 빠져나갔다. 퇴근이 늦는 것처럼 보이는 의사들은 가운을 입은 채로 별관에서 본채로 가는지 밥을 먹으러 가는지 건물을 나갔고 청소하시는 분이 이래저래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간만에 유타로에 가서 돈코츠 라면을 먹고 너무나 당연하게 면을 추가해서 먹었으며 수내역까지 걸어가서 롯데백화점에서 수선 맡긴 바지를 찾고 비니와 슬리퍼 양말을 사고 적절한 가방을 찾아봤지만 없어서 폐장 시간쯤에 나와 역시 간만에 코코호도에서 호도과자 15개를 사서 집까지 걸어오면서 먹었고 목이 말라 중간에 캬라멜 마끼아또 향이 나는 커피를 마셨는데 참 좋았더라. 뭐 그런 이야기.
집에 와서는 기타를 계속 잡고 있었는데 오늘 있었던 일 덕분에 각종 피부 질환들의 정확한 이름과 증상을 알게 되었으며 '괴사'가 뭔지도 알았고 내가 오늘 했던 검사가 드라마 'House'에 그렇게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나오던 생검(biopsy)이라는 걸 알았다.
아따 길다
건강하게 삽시다.
그래야 블로그에 이런 낙서도 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