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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대해
단상 | 04/10/20 21:32
나는 흑백사진을 싫어한다.
나는 이번 학기에 '사진의 기초'라는 강의를 듣는다.
강의 첫 번째 숙제로 '흑백사진 찍어오기'가 주어졌다.

난 정말 난감했다. 이상하게 나는 예전부터 흑백사진 찍기가 싫었다. 흑백 사진도 보면 좋은 사진들이 참 많다. 이것저것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나, 사실이 그대로 찍혀져 있거나 구도가 좋거나 대비가 강한 사진이라든가 질감이 살아있는 사진 등등. 하지만 나는 정말 찍기 싫었다. "왜 싫은데 ?"라고 물으면 나도 명쾌하게 답해줄 자신이 없다. 그냥 생각나는 게 '내가 보는 화상은 총천연색의 full color인데 내가 왜 흑백을 찍어야 하지?' 정도 ?

하지만 과제가 나왔으니 해야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충무로가서 생전 처음 필름도 사 보고, 무려 포토피아까지 가서 흑백 현상을 해 온 다음 동네 현상소에서 세피아톤으로 인화를 했다. 그리고 교수님께 보여드릴 사진을 몇 장 추려낸 후에 수업시간에 제출을 했다.

이 수업은 매시간 수강생들이 찍어온 사진을 테이블에 펼쳐 놓고 다 같이 감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매번 교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너무 사진을 자로 재면서 보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과제 내기도 너무 싫었다. 내가 보통 사진을 찍을 때는 그냥 봐서 '아 이거 좋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만 찍으니까. 그런데 숙제를 위해서는 그런 것을 무시하고 작위적인 사진을 찍어야 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던 것이다.

아무튼 사진을 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보시더니 사진을 두 부류로 가르시고 한참 생각하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이 사진 찍어 온 사람 누구죠 ?"
나는 손을 들었다.
"이 학생은 숙제 안 해도 되겠네."
부터 시작하셔서... 교수님께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셨다.

사진을 보는 눈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다.
첫 번째는 바깥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 두 번째는 자기 안의 잣대로 바깥을 보는 사람. 그래서 풍경 사진을 찍으러 가도 어떤 사람은 풍경 그 자체를 훤하게 찍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주변의 조그마한 것들이 좋아서 거기에 파인더를 들이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 학생은 남자지만 상당히 여성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다르게 말하면 조금 feminine이랄까... 이 사진들 보면 이 위쪽(첫 번째 부류)은 상당히 자기 자신의 것들과 관련이 있는 사진이에요.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거나, 책상에서 자고 있는 사람, 친구 맞죠 ? 그리고 뭐 이런 사진(돼지 인형이 침대에 있는 사진)이나. 그런데 이 쪽(두 번째 부류)은 이제 좀 숙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쪽과 섞인 것 같네요. 앞으로 이 위쪽 시각으로 계속 찍어보세요. 재미있는 거 나오겠네."

'자로 재는 듯이 보는' 교수님의 시각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게 확 날아갔다. 왜냐하면 내 사진 한 번 보시고 그렇게 확 집어내시는 게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 좀 무례하지만 '아 역시 교수 괜히 하시는 게 아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고...

요즘은 그냥 Rollei35만 쓰고 있다. 그냥 가지고 다니고 쉬워서... 게다가 이 놈은 내가 기대하는만큼의 질의 보장해 준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흑백 필름이 들어 있는데 냉큼 쓰고 슬라이드나 하나 넣어서 가을 풍경이나 담아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찍은 필름들 접사 좀 해서 올려 보고 싶은데... 지금은 내일의 시험 때문에 학교에서 밤을 샐 작정으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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