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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기간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잡담
일기 |
11/06/10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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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우들은 본부를 점거 중이고 두리반은 며칠 전에 원하던 바를 이루어냈다. 가히 푸코가 말한 미시 권력 차원에서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둘 모두에 내가 티끌만큼이나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현대는 과잉의 시대다. 보편적인 기준과 다수의 취향 등으로 선을 벗어난 것을 배제하는 사고 방식이 일반적인 지금, 칸트가 말했던 취미 판단의 보편 타당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보편성은 개별자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보편성과는 다르다. 많은 '이즘ism'으로 동일자의 지속을 뒷받침하고 개별자를 배제하는 억압이 당연시된 마당에 나와 다름을 수용할 수 있는 감수성의 재발견이 시급하다.
관계맺음은 아픔을 수반한다. 김영 선생님이 그랬다... 하지만 관계 사이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이 맞다면,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필연적인 고통이 따르는 삶을 디오니소스적 긍정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나?
"천재는 자기가 피곤하거나 남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빨리 천재되기를 포기하세요."
편견이 없어야 하고 지식이 있어야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
***를 니체가 바라봤던(그리고 죽어라 혐오했던) '키치'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이 가지는 진정성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의 영역에서만 인정되는 것이지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서는 포장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포장하니 떠오르는데, 구제역 사태 때 생매장을 하는 것을 두고 '정치는 덮기만 한다'라고 일갈하신 남선생님의 모습이 계속 생각난다.
"음악은 특권자들을 위한 성찬식탁위의 금잔(金盞)에 담긴 향내나는 미주(美酒)의 역할만을 할 수가 없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열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 것이 비단 음악뿐이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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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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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 11/06/10 14:57 R X
0.1m 얘기하는 거 맞지?
딴 얘기 다 집어치우고서라도 키치는 절대 아니지
커피 광고 찍는 키치쟁이는 거의 형용모순에 가깝지 않나 ㅋㅋ
근데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어떻게 하는 거냐 개처럼 술처먹으면 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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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sist. 11/06/10 18:51 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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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거 오늘날에 통용되는 숭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키치는 아니긴 함... 강의 노트를 좀 가져와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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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키취(Kitsch)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키취 개념을 니체에게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니체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키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판단의 기이한 혼탁, 모든 대가를 지불하면서 재미있고 즐거운 것을 얻으려는 천박한 숨어 있는 욕망, 학자인 체하는 관심사, 예술의 진지성에 대해 잘난 체하고 과시하려는 모습, 돈벌이에 대해 동물적 탐욕을 갖고 있는 주최자들의 모습, 자신들의 득실에 따라서 민중을 생각하고 의무에 대한 생각 없이 극장과 음악회를 다니는 상류층의 공허하고 정신 나간 행위 - 이런 모든 모습이 우리의 현재 예술 상태의 답답하고타락한 공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교양인들처럼 일단 이러한 공기에 익숙해지면, 누구나 이 공기가 자기의 건강에 필요한 것이라고 망상하게 된다.”
니체는 키취가 19세기말의 조야한 문화적 경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니체는 그야말로 키취적인 삶의 측면들을 키취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고상함”으로 미화하고 치장하는 속물근성을 비판한다.
니체가 보기에, 속물 교양인들이 문화를 말살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말살을 방지하기 위해 니체는 “예술을 해방시키고 예술의 숭고한 신성함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가 키취를 단순히 제거해야 할 것으로 본 것만은 아니었다. 니체가 거침없이 비난을 퍼부었던 것은 키취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속물근성에 불과한 키취적 삶을 “고상함”으로 미화하고 치장하는 도덕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도덕적 키취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니체가 그토록 혐오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유의 도덕적 키취였다. 달리 말하자면, 속물근성의 고상한 키취였다. 이러한 키취는 관념적 허상에 허덕이는 진리의 가면을 쓴 키취이다. 니체가 보기에 근대 문화는 이러한 위장된 도덕의 터 위에 세워진 키취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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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읽다 든 생각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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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sist. 11/06/10 18:57 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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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 개처럼 술처먹기
이 또한 강의노트를 좀 가져와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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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삶과 예술의 관계를 미적 형이상학의 관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내재된 상승과 고양의 계기에 바탕을 둔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다.
니체가 말하는 ‘긍정’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긍정’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란 곧 차안의 삶에 내재한 고통, 불안, 공포를 피안의 세계로 도피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삶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 곧 긍정하는 것이다.
“삶에서 지금까지 부정되었던 측면을 필요하다고 이해할 뿐 아니라, 소망할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이해한다: (...) 부정되었던 측면 그 자체를 위해서, 즉 삶의 의지가 더 분명하게 표명되는 더 강력하고도 결실이 더 풍부하며 더 진정한 삶의 측면을 위해서 말이다.” 니체전집 20,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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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념을 중심으로 위버멘쉬와 영겁회귀 등을 전개한다고 하는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을만 하냐 -_-;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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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그냥 책장만 넘겨 봐서 잘 모르겠다. 도덕의 계보 초반 몇 챕터 말고는 니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한다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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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sist. 11/06/13 03:17 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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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흐 일단 종강하면 중도 가서 구경이나 해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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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sist.'s nazono blog
no shovels, no g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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