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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
일기 |
10/12/17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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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잠에서 깨서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키던 도중에 빨래 건조대에 입술을 부딪쳐서 안쪽이 심하게 터졌다. 눈뜨자마자 그렇게 머리가 상쾌한 적은 아마 처음이었으리라. 더 웃긴 건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한 후에 좀 더 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잠든 후 여섯 시간을 더 내리 자버렸다는 사실이다. 이틀 연속으로 있던 시험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마지막 시험 답안을 제출하고도 그다지 마음의 동요가 없었던 것은 바쁜 일정 때문인지 답안을 만족스럽게 작성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마냥 기뻐하기만은 마지막 두 문제, 그것도 심지어 빈칸채우기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사실은 시험장을 나와 화장실에서 지퍼를 내리면서까지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결국 건물 안 벤치에 앉아 교재를 뒤적여 확인을 해 보았는데 그 문장들은 명확하게 교재에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공부를 더 했어도 똑같이 아리송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마침 눈도 와서 세상의 하얀 풍경이 생경한 느낌을 주어 청량감이 느껴졌지만 눈이 부셔서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습관처럼 중앙도서관으로 가서 빌리고자 했던 책들의 목록을 꺼내 대출이 가능한지 여부를 살펴보았다. 학기가 끝나서 그런지 수업 교재도 참고 도서도 모두 대출이 가능한 상태다. '잉여 인간'이 수록된 손창섭의 단편집과 책 한 권을 더 골라서 계단을 내려온다. 잠, 잠이 부족해서 머리는 계속 몽롱한 상태다. 학생증을 갖다 대고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과정에서도 실수를 해서 다시 입력을 했다. 바닥에 책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바코드 읽기 완료를 알리는 날카로운 고음의 기계 소리가 번갈아가면서 난다. 툭, 삑, 툭, 삑. 종료 버튼을 누른다. 띠로롱.
점심을 먹기 위해서 학관으로 간다. 공식 종강일은 분명 지난 주 금요일이었고 실습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후배들이 몇 번이고 자조적으로 그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은 사람들로 만원이다. 방학 기간에 학교에서 외부인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예전보다 부쩍 많아진 것 같긴 하다. 게다가 오늘은 수시 합격생 텝스 시험 및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었던 것 같다. 눈발이 날리는 아침 신공학관에는 학생 및 학부모로 건물과 그 밖이 소란스러웠으며 각 강의실에는 수험생 번호 목록같은 게 적혀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시험을 치러 인문대쪽으로 내려왔을 때 내 앞에 있던 학생을 붙잡고 길을 물어보던 어떤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옆엔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소년이 있었다. 대답을 듣자 부자는 계단을 바삐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도 곧 시험이지만 그 학생도 곧 시험이었나보다. 눈이 내릴 때는 바람이 불지 않아 세상이 평화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잠시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학관으로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메뉴에 피자돈가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무슨 종류의 커틀릿이든 아무래도 잘 먹을 수 있기에 별 문제는 없었는데 오늘 따라 유난히 소스가 진하고 짜게 느껴진다. 이틀 전에 생긴 입안의 상처를 따라 찌릿한 감각이 머리를 타고 올라온다. 그냥 순두부찌개 먹을 걸 그랬나, 아니 그랬다간 뜨거운 국물이 상처를 지지고 한바탕 난리가 났겠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서 뛰놀다 발톱을 깨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뜨거운 된장으로 내 발가락을 지졌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없어진 쇼파에 나를 앉히고 어른 셋이 붙어 한바탕 씨름했던 일이다. 때는 매미가 시끄럽게 울던 여름이었고 비닐로 된 쇼파는 녹색이었으며 팔걸이는 결이 파여진 고동색 나무였다. 그 날은 매미보다 내가 더 시끄럽고 우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버스를 타고 책을 읽는다. 운 좋게 자리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책을 꺼내들면서도 졸린데 과연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몇 쪽 읽다 보니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그냥 책만 볼 수밖에 없었다. 보고자 했던 단편 하나를 순식간에 다 읽었다. 읽고 나니 가슴에 커다란 바윗덩이가 점점 커지며 들어차는 느낌이다. 입은 혀뿌리부터 본드를 부은 마냥 꾹 다문 채로 숨구멍 하나 생기지 않고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앞은 흐릿할 뿐이고 귀에 꼽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는다. 나는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눈을 떠 보니 다음 정거장이 목적지라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 방송이 나와서 눈을 뜬 걸지도 모르겠다. 급하게 가방을 메고 카드를 꺼내 단말기에 갖다 댄 후 후다닥 하고 내린다. 행인들이 전부 모자를 둘러 쓰거나 우산을 쓰고 잔뜩 몸을 웅크리고 지나간다. 심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눈이 올 때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알량한 생각을 했던 아침이 생각나 비죽거렸다. 눈이 좀 그치면 다녀야지 하는 생각이 옆에 있던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건너편의 시커먼 삼성생명 건물을 배경으로 휘날리는 흰 눈발이 자세히 보였다. 그것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리기만 하다가 어느 새 상하좌우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움직임이 점점 거칠어지더니 이내 바람은 내 쪽으로 방향을 바꿨고 얼굴을 강타하는 차가운 파편에 어쩔 수 없이 우산을 꺼내들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또 학교로 향했다. 피곤하기도 피곤했고 평소같았으면 대강 뭘 먹고 집으로 들어가 바로 쉬었을텐데 깐풍기가 나온다고 한다. 정문에서 내려 셔틀 버스를 기다렸다 농대 앞에 내렸다. 식당에 가 보니 불이 다 꺼져 있다. 이상하다 아직 6시밖에 안 됐는데. 방학 중이라 단축 운영을 한다고 윗층만 운영을 하나보다.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내렸는데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더니 그 쪽이 지름길이었구나 싶다. 무려 리필이 되는 훌륭한 식사를 기분좋게 먹기 위해 반찬을 입으로 가져간다. 제대로 쉬지 못하면 상처가 낫지 않는다는 걸 찌릿한 감각과 함께 상기시킨다. 그래도 맛있었다.
학관까지 걸어가서 녹두로 가는 셔틀을 타야 하나, 혹시나 셔틀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5516을 타야 하나 걱정을 하던 참에 순환 셔틀이 정류장에 도착했다. 뛰어가서 셔틀을 탔다, 학교를 좀 멀리 빙 돌 셈으로. 눈을 깜빡깜빡 하면 다음 정류장이 나타나고 그 다음 정류장이 나타나는 체험도 간만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오래 비운 것 치고는 상태가 크게 나쁘지 않아 안도했다. 하지만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얼른 씻고 잘 셈이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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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sist.'s nazono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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