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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생활 0. 고등학교 시절
단상 |
08/09/21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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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금까지 밴드를 해 온 걸 정리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스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잊어버린 사실도 많겠지만 생각나는 것만 해도 꽤 재밌는 게 많을 것 같아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내가 처음에 베이스를 사겠다고 마음 먹은 건 Nirvana의 Come As You Are 인트로를 듣고 나서다. 어디서 어떻게 사야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옥션을 뒤졌다. 고1 때니까 2000년 봄이었다. 10만원 짜리 중고 Vester(세고비아에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일렉트릭 기타 브랜드) 베이스를 샀다. 수중에 5만원밖에 없었던지라 친구에게 5만원을 빌린 후에 결제를 할 수 있었다. 배송이 토요일에 됐던 걸로 기억한다. 집에 오니 기다란 박스가 현관에 누워 있었다. "너 저거 칠 줄이나 아냐?" 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는데, "이제 연습해야죠 ㅋ"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서점에서 교본을 하나 사서 크로매틱을 하며 무작정 노래들을 카피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말도 안 되지만 그 때는 튜닝기도 없었다... 모뎀을 쓰던 시절 어디선가 '기타 6줄 음을 내 주는 mp3' 이런 걸 받아서 틀어 놓고 튜닝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Come As You Are의 인트로는 기타였다...
그렇게 방구석에서 혼자 베이스를 연습하던 도중에 음악 실기 시험을 치게 되었는데, 자신이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들고 와서 직접 연주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옥타브 구분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긴 한데, mp3 들으면서 튜닝하다가 한 옥타브 정도 올려서 튜닝을 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전에 줄이 끊어져버렸다. 2번 줄이었나 1번 줄이었나... 그렇게 두 달 정도를 방치해 놓고 포항의 모 악기점에서 다다리오 스트링을 2만 5천원 주고 샀다. 베이스 스트링은 뭐가 그리 비싼지 원. 그 때 처음 줄을 갈아봤다. 지금도 그 줄이 끼워져 있는 걸 보면 참 기분이 묘하다. 대체 몇 년이나 지나버린 건지. 이 때 줄을 사면서 같이 앰프도 샀다. 왜냐하면 그냥 쳐도 소리는 나지만 방구석에서나 그렇지 음악실에서 사람들이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 때 내가 연주한 건 Red Hot Chili Peppers의 Californication이었다. 단순하지만 노래의 기본음만 계속 짚는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멜로디가 있어서 선택한 것이었다. 사실 연습은 얼마 안 했다(...)
이 때 우리 반에 기타를 치는 김모군이 있었는데 실기 시험 당일에 기타를 들고 왔다. 담임이 아침에 들어와서는 교실 한쪽에 기타와 베이스, 앰프들이 있는 걸 보고 "무슨 그룹 사운드 하나?" 생각해 보면 요즘은 그룹 사운드란 말 쓰지도 않지... 김모군은 Mr.Big의 Just Take My Heart 인트로를 쳤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는데 가을에 있는 학교 축제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다. 기타를 치는 김모군이 Mr.Big의 Green-Tinted Sixties Mind를 하자고 해서 그 곡을 하기로 했는데 이 노래는 지금 들어봐도 난이도가 꽤 있는 노래다. 시작과 끝의 기타 솔로같은 멜로디도 그렇고 중간에 기타와 베이스가 솔로를 유니즌 플레이하는 부분이라든지... Mr.Big의 보컬 어려운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드럼이 좀 쉬운 편인데 중간에 박자가 변경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같이 합주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보컬(이 놈도 김모군임)이 나와 같은 포항이 아닌 안강 출신이라서 시장통에 있는 2층 연습실에서 주말마다 같이 연습을 하곤 했다. 멤버는 둘 뿐이라 연습도 아니고 그냥 노는 수준이었지만. 대체 무슨 연습실인지 지금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난 그냥 와서 치면 된다는 이야기만 들었으니까. 보통 지하에 연습실을 두고 방음재로 도배를 해버리는데 이 연습실은 2층에 있는데다가 창문도 있었다. 아마 우리가 연습실에 있을 때는 그 시장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민폐가 아니었을지. 이 당시에 연습실에 굴러다니는 기타로 Metallica의 Master of Puppets를 아주 느린 속도로 치면서 좋아하곤 했다 낄낄...
그렇게 따로 연습을 하다가 어느 주말에 포항 청소년 문화원(명칭이 정확한지는 제껴놓고)에 모여서 연습을 했는데 환경이 정말 열악했다. 연습실 크기가 정말 좁았다. 5평 남짓한데 4명 들어가니까 아주 그냥 꽉 차버리는데... 게다가 앰프도 출력이 작았고 가장 큰 문제는 합주 중에 드럼 페달을 끊어먹었다는 것이었다. 엄청 당황했는데 굴러다니는 녹색 테이프(천처럼 찢을 수 있는)를 어떻게 말아서 그걸로 대신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헝그리한 정신으로 뭉쳐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말이 헝그리지 고딩들이 돈이 없어서...
결국 축제 전 주말에 겨우 모든 멤버들이 모여서 합주를 할 수 있었다. 장소는 버스 터미널 근처의 대도동(맞나? 그리고 여기도 시장 근처였음) 지하에 있는 합주실이었다. 보컬 놈이 무슨 재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학교의 밴드들과 친분을 만들더니 합주실을 빌렸다는 것이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유료 합주실들과는 달리 지하로 들어가면 커다란 방 전체가 합주실이었다. 항상 고정적으로 이 합주실을 쓰던 사람들도 안에서 우리가 합주하는 광경을 지켜봤는데 어찌나 긴장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던지.
축제 날이 되어서 다른 학교에서 온 밴드들도 공연을 하고 우리가 나가서 연습한 노래를 연주했다. 실수는 있었지만 그럭저럭 마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런 어려운 노래를 할 생각을 했는지 대견하다(...) 사실 베이스가 1번 2번 줄을 같이 치는 리프가 나오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곡들을 연습해 왔지만 이런 건 흔하지 않다. 게다가 기타 솔로와 함께 유니즌 플레이라니!
이후로는 밴드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열심히 쳤다. 앰프 연결 안 하면 문만 닫으면 죽어라 쳐도 소리가 절대로 방 밖으로 안 나가는 게 좋았다. 열심히 노래를 듣다가 괜찮은 리프를 따기 위해 2시간 정도를 보내는 일은 흔했다. 고2 때도 고3 때도 자정쯤 집에 들어오면 꼬박꼬박 베이스를 1시간씩 치다가 잤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늦게까지 야자를 하는데다 내가 별로 딴짓하면서 놀았던 것도 아니고 집에 오면 뭐라도 하고 놀게 필요해서 그랬던 것 같다. 베이스를 치고 있으면 공부나 성적 따윈 금방 잊을 수 있었으니까.
수능 후 나는 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이 후의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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